성범죄 피해자 보호의 결정적 열쇠, 데이터와 AI의 만남
- kava2016
- 4월 3일
- 4분 분량
[이희엽 칼럼 15]
"성범죄 피해자 보호는 이제 기술의 영역입니다."
디지털 기술이 일상을 바꾸는 시대, 피해자 보호 시스템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경찰청에서도 도입 중이고, KAVA(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 또한 데이터 및 범죄심리 기반 기술 개발에 기여하고 있는 AI 기반 조서 작성 시스템은, 단순한 디지털화를 넘어 ‘피해자 중심’이라는 철학을 담아 전례 없는 혁신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KAVA가 지향하는 AI 기반 조서 작성 시스템은 단지 첨단 기술의 도입이 아니라, 범죄라는 특수한 영역에 맞춘 ‘경량화된 대형 언어 모델(sLLM, smaller Large Language Model)’의 실전 배치입니다.
특히 성범죄 피해자의 경우, 진술 과정에서 극심한 불안과 심리적 위축을 겪기 쉬워 기존의 수사 체계만으로는 충분한 보호가 어렵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KAVA(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는 피해자 중심의 상담 시나리오, 감정 반응 데이터, 범죄심리 기반 모델링 기술을 지원하며 시스템 개발에 핵심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진술을 받아쓰기’ 위한 AI가 아니라, 피해자의 정서에 반응하고, 법적 절차를 안내하며,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정서·법률 통합형 AI 조력자’가 탄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범죄 피해자의 눈물 앞에 기술이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도록, KAVA 또한 현장에 최적화된 데이터와 감정 인식 기반 기술을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갈 것입니다.
성범죄 수사는 그 어떤 사건보다 섬세함과 정밀함이 요구되는 영역입니다. 피해자는 단순한 정보 제공자가 아닌, 트라우마의 중심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피해자를 존중하고, 실질적인 보호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사 과정 자체가 ‘피해자 친화적’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피해자의 정서와 경험보다는 제도와 절차 중심의 접근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수사 과정은 법적 요건 충족과 형식적 절차 이행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피해자의 심리적 상태나 발화의 맥락은 조사 기록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성범죄 피해자는 진술 과정에서 극도의 긴장과 수치심, 심지어 공포까지 동반하기 때문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거나 시간순으로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비일관적인 진술’이 오히려 피해자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피해자가 기억의 단편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나가는 과정을 ‘진술 번복’이나 ‘신빙성 부족’으로 해석하는 구조 속에서, 피해자는 또 한 번 침묵하게 되고, 그 침묵은 곧 사건의 전모를 드러낼 기회를 영영 잃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조사자의 역량과 경험 차이에 따라 질문 방식이나 태도, 진술 채택 여부가 달라지는 ‘조사 편차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과제입니다. 이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수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정당한 보호와 법적 구제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피해자의 진술을 정서적 맥락과 함께 분석하고, 반복 진술 없이도 핵심 정보를 추출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의 존엄성과 심리적 회복을 전제로 하는 새로운 수사 문화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더욱 주목해야 할 지점은, 피해자의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에 기반한 맞춤형 조력이 가능한 AI 기술의 방향성입니다. 성범죄 피해자는 단순히 ‘진술을 요구받는 대상’이 아니라, 심리적 충격과 신체적 반응이 복합적으로 얽힌 트라우마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일률적 질문이나 기계적인 응답 유도로 접근할 경우, 피해자는 재차 상처를 입고, 진술 자체를 중단하거나 왜곡된 표현을 선택하게 될 위험이 커집니다.
따라서 AI 기반 조사 보조 시스템은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기술이 아니라, 피해자의 음성, 언어, 표정, 호흡, 반응 속도 등 다각도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신체·정신 상태를 분석할 수 있는 전문성과 정밀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특히 말의 흐름과 어휘 선택 이면에 숨겨진 감정적 뉘앙스, 주저함, 피로, 공포 등을 문맥 안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추론할 수 있는 고차원적 언어 이해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이러한 기능은 피해자의 진술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도, 조사자에게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질문을 조정해야 할지를 실시간으로 안내하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피해자의 재진술 부담을 줄이고, 반복 질문이나 자극적 표현으로 인한 2차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현재 KAVA가 구축하고 있는 성범죄 피해자 보호지원을 위한 데이터 및 각종 범죄 유형별 데이터들은 범죄심리학 기반 시나리오 모델링 기술을 내장하여, 성범죄 유형에 따라 맞춤형 문답 구조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데이트폭력, 디지털 성범죄, 강간 등 유형별로 다른 접근 방식과 질문 설계를 적용함으로써, 피해자와 조사자 모두의 피로도를 최소화하고 진술의 정확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피해자의 인간적 존엄성과 회복 가능성을 중심에 둔 ‘정의로운 디지털 수사 환경’의 정착입니다. AI가 수사의 전 과정을 대신하진 않겠지만, 수사관의 편향을 줄이고, 피해자 중심 수사의 질을 높이며, 반복되는 2차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디지털 동반자’로서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현장 기반 데이터의 지속적인 축적과 검증, 그리고 법률·의료·심리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융합형 시스템 구축이 필수적입니다. AI는 데이터 없이는 진보할 수 없고, 데이터는 현장을 떠나선 생명력을 잃습니다. 결국 기술의 진보는 현장과 함께 숨 쉬어야 하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이제는 단순히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술로 정착시키기 위한 설계 철학과 윤리적 기준이 병행되어야 할 때입니다. 나아가 AI 기반 수사 보조 시스템은 특정 기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국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공공 인프라로 발전해야 합니다. 특히 지자체, 교육기관, 여성안심기관 등과의 연계 속에서 피해자 보호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기술의 접근성을 높이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AI는 이제 수사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회복을 설계하는 ‘디지털 복지 시스템’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성범죄 피해자 보호는 더 이상 제도나 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회복과 존엄을 위한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하는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기술, 그리고 그 기술을 신중히 다듬어가는 사회적 의지가 필요합니다.
AI 기반 피해자 보호 시스템은 단순히 수사의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인식하고 공감하며 법적 절차를 안내할 수 있는 조력자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특정 전문가나 기관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국민 모두가 누릴 수 있어야 할 디지털 권리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데이터를 공공재로 만들고, 기술을 사회적 안전망으로 전환하는 일. 피해자의 목소리가 왜곡되지 않고, 보호받으며, 온전히 전달될 수 있는 기술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디지털 정의'의 시작입니다.

"기술이 사람을 살리는 시대라면, 그 기술은 사람의 말을 정확히 듣고, 아픔에 맞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KAVA 이사장 이희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