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이라는 말이 환자에게만 적용되지 않도록
- kava2016
- 12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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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엽 칼럼 16]
“요즘 멘탈이 좀 나갔어.”
“쟤 좀 정신적으로 힘든가 봐.”
“그런 건 상담받아야 하는 거 아냐?”
우리는 일상 속에서 ‘정신건강’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하지만 그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어김없이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말끝은 흘러내립니다. 마치 그 단어가 누군가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신호처럼, 누군가를 ‘치료받아야 할 사람’으로 분류하는 기준처럼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사회는 ‘정신건강’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정신질환’과 동일시해버리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 정신건강은 언제나 ‘문제가 생긴 누군가’의 것이 되고, 우리 대부분은 그 바깥에 서 있는 것처럼 굴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정말 ‘괜찮은 사람들’일까요?
정신건강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진단을 받고 병원을 찾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관계, 일상, 구조 속에 깔려 있는 조건입니다.
우울과 불안은 ‘증상’이기 전에 ‘신호’입니다.
과도한 경쟁, 끊임없는 비교, 쉴 틈 없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자신을 ‘기능’으로만 규정하게 되고,
실패나 쉼을 ‘비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왜 이렇게 예민해?”, “그 정도는 다 참지.”라는 말 속에는
감정의 무게를 다루지 않겠다는 사회의 무관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정신건강복지학을 공부하면서 저는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정신질환은 진단명보다 먼저, ‘돌봄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요.
상담실에서 마주한 많은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
그 무게를 혼자 견디다 지쳐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정신건강은 의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사회가 어떤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관계,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문화가 없다면,
아무리 뛰어난 치료기술도, 회복의 실마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신건강’을 ‘회복해야 할 누군가’의 문제로 한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 모두는 매일의 스트레스와 감정의 흔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단지 그 흔들림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정신건강에 대한 정책적 접근은 훨씬 더 일상적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치료 중심, 의료 중심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진단받은 사람만 ‘관리’하고, 병원에 가야만 ‘돌봄’이 시작되는 구조는
이미 늦은 개입입니다.
우리는 예방적 정신건강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정서 코칭이, 직장에서는 감정노동자의 마음이,
지역사회에서는 고립된 주민의 생활이
적절히 포착되고, 연결되고, 쉬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정신건강은 ‘약한 사람의 문제’라는 인식을 걷어내야 합니다.
우울하다고 해서, 번아웃에 빠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능하거나 특별한 실패자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고통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이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언론, 교육, 제도, 조직문화 전반에 걸쳐
‘정신건강권’을 하나의 인권으로 인식하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셋째, 누군가의 정신건강을 돕는 일은 전문가의 몫으로만 남겨두어선 안 됩니다.
회복은 전문가의 언어가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연결’에서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 말, 나도 이해돼.”
“너 요즘 많이 힘들어 보이더라.”
그 짧은 한마디가 누군가를 절벽 끝에서 다시 걷게 합니다.
정신건강은 사회적 책임이며,
우리는 서로의 ‘정서적 인프라’가 되어야 합니다.
정신건강은 ‘치료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
‘함께 지켜야 할 관계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흔들릴 수 있고,
누구나 무너질 수 있으며,
무너지지 않은 채 살아남았다고 해서
건강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흔들림을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무너짐에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정신건강은
‘괜찮아?’라는 질문 하나에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그 한 마디가 감정의 언어를 꺼내게 하고,
그 언어가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삶을 다시 일으킵니다.
정신건강은 결국 사회의 성숙도입니다.
누가 가장 먼저 아파야 할 때,
그 사람을 얼마나 안전하게 안아줄 수 있는가,
그 질문 앞에 우리 모두는 서 있어야 합니다.
사단법인 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 또한 정신건강이 곧 사회안전망의 기초임을 인지하며,
일상의 스트레스가 방치되고, 외로움이 고립으로 굳어질 때, 그 감정이 폭력의 형태로 터져 나올 수 있기에, 우리는 예방적 정서돌봄을 가장 앞선 보호의 방식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신건강이 무너지기 전, 그 신호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연결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정신건강은 약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회의 품격입니다.
